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잔 올 스타즈 (문단 편집) == 록 밴드 대중화의 선구자 == >사실, 저는 사잔이나 쿠와타씨에 관해서는 열성적인 청취자는 아니었지만, '''지금 현재 일본의 유명 음악을 만들고 있는 사람중에서 쿠와타씨의 직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록의 리듬에 억지로 일본어를 올려 버리는 수법이라든지 말의 의미보다도 리듬 중시라는 작사를 코믹하게 되지 않는 범위에서 스마트하게 해 버립니다. '''쿠와타 케이스케씨야말로, [[J-POP]]의 [[대부]]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 >[[쿠사노 마사무네]] ([[스핏츠]]의 보컬)[[https://coconutsjapan.com/entertainment/post-67328/67328/|#]] 사잔의 데뷔 전에는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록음악의 위치는 당시 엔카나 가요 등의 대중음악과 비교하여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성장기로 여겨지는 1969년~1972년 사이에 데뷔한 선배 밴드인 RCサクセション([[RC 석세션]], 1969년~1991년), [[핫피 엔도]](1969년~1972년), キャロル(CAROL, 1972년~1975년), オフコース(OFF COURSE, 1969년~1989년)[* 일본 가요계의 전설 중 한명인 '''[[오다 카즈마사]]'''가 이끌던 그룹. 사실 이들 또한 이전까지는 포크송 듀오 그룹이었으나 1979년도, 즉 사잔이 막 나타나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에 5인조 락밴드로 개편되면서부터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사잔과 함께 락 대중화의 문을 연 셈.][* 참고로 같은 록밴드지만 사잔과 오프 코스는 음악적 스타일이 꽤나 다른데, 존 레논(사잔)과 폴 맥카트니(오프 코스)가 각각 다른 밴드에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고 하면 두 밴드의 차이를 이해하기 쉬울 듯.] 등이 기반을 닦고, 캐롤에서 솔로로 데뷔한 야자와 에이키치가 홀로 록음악을 대중 앞에 가져오는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사잔은 그런 일본 음악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둔 록밴드로, 록밴드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78년 데뷔와 동시에 주목을 끌면서 데뷔한 직후 이듬해 홍백가합전에 출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당시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후 쿠와타가 솔로 활동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실험정신 가득한 하드록 활동으로 눈을 돌린 구와타 밴드 시절까지 80년대 상황에서 사잔은 일본 음악계에서 밴드라는 형태로 마츠다 세이코 같은 초거물 솔로 아티스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유일한 밴드였으며,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정도가 되어서야 안전지대, 보위 같은 록 밴드가 각자 이뤄온 음악성을 기반으로 인기 음악 프로그램에 단골로 나오는 대중적 인기와 확장까지로 이뤄지게 되었고, 비로소 록 장르가 일본 음악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타 밴드 팬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사잔의 데뷔연도인 1978년부터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TBS [[더 베스트 텐]] 등에서 밴드음악은 대중매체 기준으로는 비주류인 편이였다. 단적으로 데뷔연도 당시 사잔의 평가가 후한 평가라서 파격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사운드, 깎아내리는 쪽에서는 돌+I 밴드 취급이였다.[* 겉모습으로는 그런 평가가 나올만 했던 것이, 데뷔 당시 TV 출연 영상을 보면 보컬 쿠와타가 멀쩡한 옷도 아닌 난닝구 차림, 다음 출연 때는 잠자리채 들고 흔들기 등등으로 카메라 앵글 밖으로 날뛰면서 데뷔곡을 부르는 모습이였다.] 사실 그랬기에 1979년에 바로 '이토시노 에리'가 나온 것이 센세이션이기도 했다. 지금도 사잔 3대 발라드곡으로 꼽히는 이토시노 에리 때문에 당시 '마음대로 신밧드' 같은 곡이 다시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대중과 음악평론계에서 '어? 19금 밴드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만들었다고?'라는 충격을 받았으며, 쉽게 일본가요계를 접수하게 되었다.[* 단순한 일본 내 명곡이 아니라, 세계적 명곡으로 [[레이 찰스]]가 영어 번안곡을 불렀고, 중국어나 여러 유럽계 언어, 아랍어 등 수많은 언어로 번안되었다. 한국에서도 이십여년 뒤 가수 박상민이 번안곡을 불렀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밴드로써 대중음악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로 나올 수 있는 인지도라고 했을 때는 사잔이 먼저 개척해서 탑클래스로 올라간 다음에 타 밴드들도 대중적 인지도와 출연 흥행카드를 거머쥐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쓰자면 데뷔 당시 [[노라조]] 컨셉으로 데뷔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파급력을 가져온 밴드가 약 40년 동안 활동을 이오면서 그 위상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잔의 특성을 본다면 한국 가수에서 정확히 딱 누군가로 대입하기가 어려운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데뷔 앨범의 음악성이 당시로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는 점, 이 후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면서 넓은 음악적 저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당시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고 활동한 [[산울림]]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공연 기술이나 퍼포먼스 등에서는 싸이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환갑이 되고도 싸이보다 독하면 독했지 약하지 않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